도시형성의 역사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600년 역사도시이자 1,000만 인구의 거대 도시로서 동북아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선도하는 중심도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세계 7대 교역국의 수위도시(Primate City)로서 그 위상은 날로 증대되고 있다.
지리적으로 볼 때, 서울은 한반도의 요충지로서 줄곧 민족사의 중심이 되어 왔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도읍지인 위례성이 위치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삼경(三京) 중 남경(南京 : 남쪽의 수도)이었으며, 조선이 개국하면서 태조(太祖)는 1394년 서울을 수도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서울의 이름은 한양(漢陽)이었다.
그 후 서울은 민족사의 번영과 시련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으며, 우리 민족의 탁월한 우수성과 근면성을 바탕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세계가 주목하는 서울’로 거듭나게 되었다.
선사 및 고려시대의 서울
한반도의 중앙을 굽이쳐 흐르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정학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장소였다. 한강주변에서 발견되는 유적과 유물, 기록들은 선사시대 이래로 서울이 줄곧 한반도의 요충지로서 민족역사의 중심에서 성장해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주거지가 형성되어 왔던 서울은 삼국시대에 이르러 백제의 도읍지로 선택되어 처음으로 수도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결과로 고구려 영토인 북한산주(北漢山州), 남평양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고, 삼국의 주도권이 신라에 넘어가게 되자 서울은 다시 신라의 한주(漢州) 한양군(漢陽郡)이 되었다.
서울이 도시로서의 어엿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이다. 1067년(문종 21년)에 삼경제도가 갖추어짐에 따라 서울은 고려왕조의 남쪽 서울(남경)로서 궁궐이 세워지게 되고 주민이주가 시작되어 비로소 도시로서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개국과 한양천도 : 태동기
태조(太祖)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새 도읍의 건설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때 천도의 후보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풍수지리였다. 계룡산이 후보지로 대두된 것도, 무악이 거론된 것도, 그리고 개성을 고수하자는 의견도 표면적으로는 모두 풍수지리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한양천도를 결정한 태조는 '신도궁귈조성도감'을 설치하여 신수도의 도시계획을 구상하였다. 이어서, 10월에 천도를 결행하고 11월에는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하여 종묘와 궁궐, 관청들의 공사를 시작함으로써 실질적인 신수도 건설이 실시되었다.
1395년 6월, 태조는 신수도의 명칭을 한양부에서 한성부로 고치고 수도를 5부(部) 52방(坊)의 행정구역으로 분할하였는데, 도성 안을 동·서·남·북·중부의 5부로 크게 나누고 그 밑에 총 52개의 방을 두어 행정구역상 이원적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한성부는 도성내부와 그 주변의 십리(十里)구역, 이른바 "성저십리(城底十里)"로 확정되었다. 도성의 축조는 궁궐과 종묘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도성축조도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총 59,500척(尺)에 이르는 성곽의 위치는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따라 실측·결정되었다. 약 4년간에 걸친 공사를 통하여 신수도로서의 틀이 갖추어졌으나 태조의 뒤를 이은 정종(定宗)이 개성으로 환도함으로써 한양은 다시 쇠락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신수도의 건설은 1405년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환도한 후 시전행랑(市廛行廊)을 건설하여 신수도 내 간선도로의 구획을 확정하고, 1422년 태조 때 건설한 성곽을 세종(世宗)때 석축으로 개축하여 성곽의 둘레를 확정하는 한편 1403년 신수도의 중심을 동서로 흐르는 개천의 정비공사를 마무리함으로써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조선 초기의 서울의 상황은 조선 중기의 전란에 휩쓸리기 전까지 약 150년간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조선후기의 서울 : 성숙기
태조(太祖)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새 도읍의 건설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때 천도의 후보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풍수지리였다. 계룡산이 후보지로 대두된 것도, 무악이 거론된 것도, 그리고 개성을 고수하자는 의견도 표면적으로는 모두 풍수지리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한양천도를 결정한 태조는 '신도궁귈조성도감'을 설치하여 신수도의 도시계획을 구상하였다. 이어서, 10월에 천도를 결행하고 11월에는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하여 종묘와 궁궐, 관청들의 공사를 시작함으로써 실질적인 신수도 건설이 실시되었다.
1395년 6월, 태조는 신수도의 명칭을 한양부에서 한성부로 고치고 수도를 5부(部) 52방(坊)의 행정구역으로 분할하였는데, 도성 안을 동·서·남·북·중부의 5부로 크게 나누고 그 밑에 총 52개의 방을 두어 행정구역상 이원적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한성부는 도성내부와 그 주변의 십리(十里)구역, 이른바 "성저십리(城底十里)"로 확정되었다. 도성의 축조는 궁궐과 종묘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도성축조도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총 59,500척(尺)에 이르는 성곽의 위치는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따라 실측·결정되었다. 약 4년간에 걸친 공사를 통하여 신수도로서의 틀이 갖추어졌으나 태조의 뒤를 이은 정종(定宗)이 개성으로 환도함으로써 한양은 다시 쇠락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신수도의 건설은 1405년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환도한 후 시전행랑(市廛行廊)을 건설하여 신수도 내 간선도로의 구획을 확정하고, 1422년 태조 때 건설한 성곽을 세종(世宗)때 석축으로 개축하여 성곽의 둘레를 확정하는 한편 1403년 신수도의 중심을 동서로 흐르는 개천의 정비공사를 마무리함으로써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조선 초기의 서울의 상황은 조선 중기의 전란에 휩쓸리기 전까지 약 150년간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개항기 및 일제강점기 : 혼란과 시련기
개항기 도시구조에 가장 큰 변화를 초래한 것은 외국 거류민의 집거(集居)였다. 용산 일대와 이태원 일대가 일본군의 주둔지로 개발되었고 개항 이후 경제권을 쥐게 된 일본인들이 청계천 이남, 즉 남촌(南村)에 집거하게 되면서 남촌지역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새로운 상업, 경제의 중심으로 개발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종로지역은 정치, 행정의 중심이 되고, 중구지역은 경제, 상업의 중심이 되며, 용산지역은 군사중심으로 바뀌게 되어 서울의 도시공간구조의 재편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는 노선전차의 건설이었다. 전차라는 새로운 교통수단의 등장으로 조선시대 보행중심의 도시구조는 본질적인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912년 을지로 노선의 개통으로 총 연장 39km에 달하는 교통망이 확립되면서 서울은 노선전차 중심의 도시로 변모하였다.
일본은 1912년부터 20여 년간 서울의 도시변화에 많은 영향을 준 시구개정사업을 시행하였으며 1934년에는 조선시가지계획령이 발표되었다. 이후 도시개발의 주축인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되어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영등포, 돈암, 대현지구 등 10개 지구의 서울 외곽지역이 개발되었다.
해방과 전쟁 : 격변기
해방 이후부터 제1공화국 시대인 1960년까지의 15년은 우리 역사상 격변의 시기였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경성부가 서울시로 개칭되고, 그 이듬해에는 경기도 관할로부터 분리되어 서울특별자유시가 되었다. 3년 뒤인 1949년에는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으며, 해외동포의 귀국, 월남한 난민과 이주민들의 서울 집중으로 인하여 도시행정구역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이후 한국전쟁은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도시파괴를 가져왔다. 부산임시수도시절 도시계획위원회에 의해 서울 전재 부흥 계획(1952.3.25 고시)이 수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크게 적용되지는 못했다.
고도성장의 중심도시 : 발전도약기
광복 이후 1960년까지가 혼란과 전란으로 인한 파괴에 시달린 시기였다면 1960년대부터는 그것을 딛고 일어서 서울이 현대도시로 부상해 나아가는 시기라 볼 수 있다. 현대적 도시건설의 초기라 할 수 있는 1960년대는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71)의 추진으로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게 된 때였다. 특히 서울로의 인구집중은 이 기간 동안 급속히 심화되어 1963년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서울의 도시계획구역이 동북부와 강남으로 확장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도시로의 과도한 집중이 점점 큰 문제로 대두되어 도시계획이 대도시권 성장억제 측면에서 접근되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지금까지의 서울위주의 도시건설로 인해 야기된 수도권 인구의 과밀화를 억제하고 전 국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구체적 계획들이 본격적으로 입안되었다.
한편 1970년대 이후는 서울이 명실상부한 현대도시로 탈바꿈하는 시기였다. 업무 및 상업의 중심지인 도심에 고층의 오피스 건물이 재개발사업을 통하여 들어서기 시작하였으며, 1960년대에 시작된 강남개발도 본격화되어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개발되었다. 청량리, 미아리, 영등포, 천호, 영동 등의 부도심이 형성되었고 부천, 의정부, 성남, 안양, 반월. 광명 등이 서울의 위성도시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도심의 현대화와 부도심의 형성, 그리고 외곽의 위성도시의 건설로 과거 서울의 시가지가 청계천과 종로를 경계로 북촌과 남촌이 구분되었던 것과는 달리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으로 구성되고 그 주위로 많은 위성도시들을 거느린 거대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대중교통도 버스에서 지하철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1974년 1호선 개통)
1980년대의 서울은 1981년 9월 올림픽 유치 결정과 11월의 아시안게임 유치 결정으로 도시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1980년대 서울의 도시개발은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정비와 건설의 시기였으며, 주택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대규모 택지개발도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서울의 광역화와 지속가능한 도시개발 : 번영기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 대회를 성공리에 치른 서울은 명실상부한 세계속의 국제도시로 부상하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울의 영향력은 시계를 넘어 광역화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단순한 행정체계상의 도시구분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다양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서울 대도시권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는 현재 서울 대도시권의 범위로 서울내의 반경 30~40km에 이르는 지역이며 향후 경기도 전역으로 확대되어갈 전망이다.
한편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의 개막과 함께 과거 성장 중심의 도시개발 정책에서 지속 가능한 도시 개발로 정책기조가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 7월, 전국 최초로 도시계획조례를 제정하였으며, 2002년 월드컵 대회 개최를 계기로 환경친화적 도시의 실현을 위한 정책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서 청계천 복원사업을 통해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환경친화적인 도시공간을 마련하였다.
세계 5대 대도시를 지향하며 : 도시경제문화의 주도기
창의시정을 이끌어가고 있는 서울은 ‘맑고 매력있는 세계도시’로서 성숙된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으며, 역사문화도시의 정체성 확보와 최첨단 국제도시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다양한 도시정책을 서울 공간상에 실현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정책사례로는 도심재창조 프로젝트와 한강 르네상스, 동북권 르네상스와 같은 권역별 계획과 용산국제업무지구, 마곡지구, 상암DMC 개발사업 등을 꼽을 수 있으며, 협상에 의한 개발방식인 新도시계획 체계의 운용은 도시계획행정의 투명성을 제고시킬 것이다. 또한 선진도시로의 품격과 격조 높은 도시미관을 연출하기 위한 도시디자인 부문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와 같은 미래지향적 도시계획을 기반으로 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서울은 세계 대도시 중 도시경쟁력 5위권인 창조도시로 재탄생할 것이다.
도시형성의 변화
도시구조의 변화
조선왕조 초기에 형성된 서울의 도시구조는 조선 중기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중기이후 인구가 차츰 늘어나고 상업이 번성해가면서 후기에는 도성 외곽지역에 점적인 형태로 위성도시들이 형성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서울이 시가지가 남쪽으로 확산되어 조선시대의 동서축의 도시구조가 남북축의 도시구조로 바뀌기 시작했다. 또 4대문안 도성 내에 한정되었던 시가지가 확대되어 용산, 영등포 일대가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도시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함께 시가지가 한강 이남까지 확산되어 나가고, 기존의 도심 외에도 영등포 · 영동 · 잠실 등의 부도심이 형성되는 동시에 주변에 위성도시들이 형성되는 거대도시 서울로 탈바꿈되었고, 또 수도권이 하나로 묶이는 광역도시화의 길을 열게 되었다.
도심 간선 가로망의 변천
서울의 도성 내, 즉 4대문안 지역의 가로망은 조선 초기에 그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후 600년 중에서 조선시대 500년 동안은 큰 변화가 없었으나 서울이 현대도시로 탈바꿈하면서 조선시대의 가로망위에 새로운 가로가 건설되었고 기존의 가로폭이 확장되는 등 체계상으로 큰 변화를 겪어왔다.
한성부시대의 가로망 구조는 동대문(흥인문)과 경희궁을 잇는 종로가 중심이 된 동서축 위주의 가로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경성부 시대 전기에는 용산이 개발되면서 새로운 남북축이 형성되었고, 후기에는 현재의 율곡로, 충무로, 대학로가 조성되어 현대와 유사한 체계가 형성되었다. 서울특별시 시대에는 퇴계로가 건설되었으며, 율곡로가 동대문과 연결되고 사직터널이 건설되어 도성내의 1차 순환가로 구조가 형성되어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가로망의 형성은 한성부 시대가 순수한 보행중심의 체계로 형성된 것이었으며, 경성부 시대에서는 간선을 전차에 그 이외는 보행에 의존하던 체계였음에 비하여, 서울특별시 시대에서는 가로체계가 자동차 교통위주로 바뀌고 동시에 지하철망이 형성되어 대량·대중교통수단체계로 변화하였다.
도심 간선 가로망의 변천
서울 도시형태의 기본단위는 조선시대의 'ㄱ', 'ㄷ', 'ㅁ'자형의 한옥 도시주택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주택이 모여 동네를 이룰 때는 대단히 밀집된 집합형태를 나타냈는데, 몇 집이 모여 이웃을 이루고 이웃들이 모여 보다 큰 이웃을 형성하며 이것이 다시 모여 동네를 구성하는 것과 같이 위계적인 구성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도시조직의 원형은 오랜 시간과 전쟁의 피해 그리고 현대화의 물결에 밀려 거의 다 사라지고 일부지역에서만 크게 변모된 상태로 그 자취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ㄱ', 'ㄷ', 'ㅁ'자형의 한옥들은 2층 양옥과 아파트, 연립주택으로 바뀌었고, 육조거리인 세종로 양측에 들어서 있던 관아들도 정부종합청사로 바뀌었으며, 종로 양측의 시전행랑도 그 자취만 남긴 채 사라지고 그 자리에 중층, 고층의 빌딩들이 들어섰다. 한편 신시가지인 강남은 구시가지인 강북과 전혀 다른 완전한 새로운 도시조직으로서 나타났다. 서구에서 도입된 근대적인 도시계획의 이념하에 고층의 아파트와 업무빌딩, 대가구, 넓은 도로 등으로 구성된 새로운 도시조직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도시조직이라도 그것이 우리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선택된 이상, 그 속에는 우리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적 전통요소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건 보이지 않는 형태로건간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서울의 모습이 시대에 따라 많이 변화해 온 것처럼 서울에 적용된 도시계획의 원리도 많은 변화를 하여 왔다. 조선시대 한양의 도시건설에 적용된 도시계획에는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일제시대 때에 서구의 근대적인 도시계획원리가 도입되었으며, 광복 후에는 많은 현대적인 도시계획기법들이 적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도시계획법은 1934년에 제정된 조선시가지계획령이었다. 1962년에는 우리의 손에 의해 도시계획법이 최초로 제정되었으며, 그 후 많은 관련법들이 제정되거나 개정되어 왔다.
근대적인 도시계획원리가 도입된 후 도시계획의 체계도 크게 변화하였다. 현재 우리나라 도시계획은 크게 도시기본계획, 도시관리계획, 시행계획의 3단계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한양 도시계획의 원리
1394년 한양은 천도와 함께 한성부로 개칭되고, 왕도로서의 도시계획이 착수되었다. 한양의 도시계획은 왕궁을 중심으로 종묘가 왼쪽에 사직이 오른쪽에 있는 배치개념을 따랐으며, 격자형 가로와 4대문을 계획적으로 건설하였다.
이러한 도시계획의 원형은 주례고공기에서 찾을 수 있다. 고공기에 의하면 정방형의 도시에 격자형의 가로망을 가진 도시로서 좌묘우사, 전조후시적 도시형태를 도시계획적 원형이라고 주장하였다. 동양적 도시계획의 원형이 가장 대표적으로 적용된 도시가 중국의 낙양과 장안이며, 우리나라의 경주, 한양과 일본의 나라, 경도의 도시계획에 영향을 준 것은 장안 방식의 도시계획이었다. 또 풍수지리설도 한양의 도시계획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양적 풍수지리설에 따라 배산임수와 주산, 안산, 조산, 좌청룡, 우백호라는 지형적 조건을 최대한 살리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근대적 도시계획의 도입
서울에서 최초로 근대적 의미의 도시계획이 수립된 것은 1930년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안은 실제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이 제정됨으로서 경성부는 새로운 도시계획, 즉 경성시가지계획을 1936년 수립하였으며 이 계획이 우리나라 근대 도시계획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계획에서는 1959년을 목표로 하여 당시의 경성부 전역 35.1㎞와 주변지역을 포함한 총 108.8㎞를 계획구역으로 설정하였으며, 계획인구를 70만으로 설정하였다. 또 용도지역으로서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 그리고 유보지역인 미지정지역을 지정하였으며, 도로의 계획도 오늘날과 같이 대로 ㎞ 중로 ㎞ 소로 등 도로폭 위주로 계획하였다.
도시기본계획의 수립
1960년대부터는 국가차원에서 경제개발계획이 수립 ㎞ 시행되고,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가 국가성장의 중추역할을 하였으며, 대도시로 인구가 급격히 집중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들어서서 서울의 도시계획은 도시기본계획, 즉 마스터플랜의 수립이 시작된다. 도시기본계획의 수립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도시의 발전방향과 미래상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었다.
1963년에 와서 서울인구는 300만을 넘어서게 되었고 도시계획구역도 713.24㎞로 대폭 확대되었다. 이러한 서울의 성장을 현실적으로 수용하고 인구 500만이 거주하는 현대적 도시를 건설한다는 목표 아래 1966년 서울도시기본계획이 수립, 발표되었다. 이는 1985년을 목표년도로 하는 종합적 장기계획으로 이전의 지역지구제와 가로망 중심의 물적 계획에 비해 형식면에서 사회경제부문을 포함한 종합계획의 성격을 지녔으며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되는 계획이었다.
1966년 기본계획은 5년이 채 못되어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985년 목표인구 500만이 1970년 7월에 이미 넘어서게 되고, 아울러 수도권 인구집중억제의 강화로 인한 제반여건의 변화를 부분적으로 보완하는 수정계획이 1972년에 수립되었다.
1972년에는 비록 도시기본계획으로 명명되지는 못했으나 물리적 계획과 사회 경제적 계획까지를 포괄하는 시정종합계획이 수립 ㎞ 공포되었다. 이 계획에서는 1972년의 도시기본계획 수정안이 많이 반영되었으며, 목표년도인 1981년의 계획인구를 750만으로 설정하였다.
1978년에는 2000년을 향한 제2차 서울도시기본계획안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처 공포도 되기 전에 목표인구설정상의 비현실성과 상위계획인 수도권정비계획의 변경으로 인해 백지화가 불가피하였다. 이에 따라 1980년 서울 도시개발 장기구상 및 중기계획이란 이름으로 수정작업이 이루어졌다.
그후 서울의 도시계획은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졌다. 1981년부터 1983년 사이에 수립된 이른바 구단위 개발계획이 그것이다. 구는 도시계획에 관한 입안권이나 결정권도 없었지만 구로 하여금 개발계획을 수립토록 하여 구의 개발을 위한 기본계획적 성격을 부여하도록 하였다.
1980년대에는 지난 70년대의 개발억제적 정책으로부터 벗어나 올림픽 개최도시로서 개발촉진적 시책이 추진되었고, 지하철 3, 4호선의 개통, 자가용 승용차 보유율의 증대 등으로 인해 서울의 공간구조는 대변혁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에 서울시는 1984년 서울도시기본계획안을 다시 성안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의 개최 등 도시여건의 변화를 수용하고 도시기본계획의 법정화 절차를 밟기 위한 계획수립에 착수하였다. 1990년에 확정된 「2000년대를 향한 서울시 도시기본계획」은 지금까지 수립되어온 계획중 실질적 의미를 갖는 최초의 법정계획이다.
이후 1994년, 2011년 목표 서울시 도시기본계획 수정 보완을 착수하여 1995년 초안이 완성되었으나 민선자치시대를 맞이하여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을 보완하라는 요구에 의거 사회복지 공원녹지 등 사회분야를 대폭 보완하여 건설교통부 승인을 거쳐 두 번째 법정계획인 2011년 목표 서울도시기본계획을 1997년에 공고하게 되었다.
한편, 제4차 국토종합계획과 제2차 수도권정비기본계획 및 개발제한구역 우선해제 등 상위계획 및 주요정책의 변경사항 반영과 2011년 서울도시기본계획의 타당성 검토와 수정 ㎞ 보완을 위해 2004년 6월 「2020년 서울도시기본계획」을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협의를 거쳐 중앙도시계획위원회에서 확정되어 현재까지 운영 중에 있다.
또한 최근에는 21세기 새천년 서울의 위상과 미래상을 재정립하고 신 국토계획, 수도권계획 등 상위계획과 저탄소녹색성장, 인구변화추세 등을 반영한 2020년 도시기본계획의 재정비계획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