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600년 역사도시이자 1,000만 인구의 거대 도시로서 동북아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선도하는 중심도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세계 7대 교역국의 수위도시(Primate City)로서 그 위상은 날로 증대되고 있다.
지리적으로 볼 때, 서울은 한반도의 요충지로서 줄곧 민족사의 중심이 되어 왔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도읍지인 위례성이 위치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삼경(三京) 중 남경(南京 : 남쪽의 수도)이었으며, 조선이 개국하면서 태조(太祖)는 1394년 서울을 수도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서울의 이름은 한양(漢陽)이었다.
그 후 서울은 민족사의 번영과 시련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으며, 우리 민족의 탁월한 우수성과 근면성을 바탕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세계가 주목하는 서울’로 거듭나게 되었다.
선사 및 고려시대의 서울
한반도의 중앙을 굽이쳐 흐르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정학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장소였다. 한강주변에서 발견되는 유적과 유물, 기록들은 선사시대 이래로 서울이 줄곧 한반도의 요충지로서 민족역사의 중심에서 성장해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주거지가 형성되어 왔던 서울은 삼국시대에 이르러 백제의 도읍지로 선택되어 처음으로 수도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결과로 고구려 영토인 북한산주(北漢山州), 남평양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고, 삼국의 주도권이 신라에 넘어가게 되자 서울은 다시 신라의 한주(漢州) 한양군(漢陽郡)이 되었다.
서울이 도시로서의 어엿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이다. 1067년(문종 21년)에 삼경제도가 갖추어짐에 따라 서울은 고려왕조의 남쪽 서울(남경)로서 궁궐이 세워지게 되고 주민이주가 시작되어 비로소 도시로서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개국과 한양천도 : 태동기
태조(太祖)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새 도읍의 건설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때 천도의 후보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풍수지리였다. 계룡산이 후보지로 대두된 것도, 무악이 거론된 것도, 그리고 개성을 고수하자는 의견도 표면적으로는 모두 풍수지리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한양천도를 결정한 태조는 '신도궁귈조성도감'을 설치하여 신수도의 도시계획을 구상하였다. 이어서, 10월에 천도를 결행하고 11월에는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하여 종묘와 궁궐, 관청들의 공사를 시작함으로써 실질적인 신수도 건설이 실시되었다.
1395년 6월, 태조는 신수도의 명칭을 한양부에서 한성부로 고치고 수도를 5부(部) 52방(坊)의 행정구역으로 분할하였는데, 도성 안을 동·서·남·북·중부의 5부로 크게 나누고 그 밑에 총 52개의 방을 두어 행정구역상 이원적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한성부는 도성내부와 그 주변의 십리(十里)구역, 이른바 "성저십리(城底十里)"로 확정되었다. 도성의 축조는 궁궐과 종묘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도성축조도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총 59,500척(尺)에 이르는 성곽의 위치는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따라 실측·결정되었다. 약 4년간에 걸친 공사를 통하여 신수도로서의 틀이 갖추어졌으나 태조의 뒤를 이은 정종(定宗)이 개성으로 환도함으로써 한양은 다시 쇠락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신수도의 건설은 1405년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환도한 후 시전행랑(市廛行廊)을 건설하여 신수도 내 간선도로의 구획을 확정하고, 1422년 태조 때 건설한 성곽을 세종(世宗)때 석축으로 개축하여 성곽의 둘레를 확정하는 한편 1403년 신수도의 중심을 동서로 흐르는 개천의 정비공사를 마무리함으로써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조선 초기의 서울의 상황은 조선 중기의 전란에 휩쓸리기 전까지 약 150년간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조선후기의 서울 : 성숙기
태조시대에 축조되기 시작하여 세종(世宗)시대에 완성된 서울의 시가지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거듭된 전란으로 서울의 궁궐, 시전상가(市廛商街), 민가(民家)가 파괴되고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그 후 약 100년에 걸쳐 점진적인 복구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정조시대에 이르러서는 전란 이전보다도 번성한 시가(市街)의 모습으로 수도의 위용을 자랑하게 되었다.
전란 후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결국 성저십리의 면(面)(성 밖 십리 이내 지역에 둔 행정구역: 이곳에서의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경작, 주택건설, 묘지, 벌목이 금지되어 있었다)이 주거지화 되었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와 시가지의 확장은 상업발달의 기반이 되었고, 도시구조를 변화시켰다. 용산, 서강, 마포, 서빙고(지금의 옥수동)는 한강을 통하여 전국의 물자가 몰려드는 곳이었고, 누원(樓院)(지금의 의정부시 호원동), 송파, 과천은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하였다.
개항기 및 일제강점기 : 혼란과 시련기
개항기 도시구조에 가장 큰 변화를 초래한 것은 외국 거류민의 집거(集居)였다. 용산 일대와 이태원 일대가 일본군의 주둔지로 개발되었고 개항 이후 경제권을 쥐게 된 일본인들이 청계천 이남, 즉 남촌(南村)에 집거하게 되면서 남촌지역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새로운 상업, 경제의 중심으로 개발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종로지역은 정치, 행정의 중심이 되고, 중구지역은 경제, 상업의 중심이 되며, 용산지역은 군사중심으로 바뀌게 되어 서울의 도시공간구조의 재편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는 노선전차의 건설이었다. 전차라는 새로운 교통수단의 등장으로 조선시대 보행중심의 도시구조는 본질적인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912년 을지로 노선의 개통으로 총 연장 39km에 달하는 교통망이 확립되면서 서울은 노선전차 중심의 도시로 변모하였다.
일본은 1912년부터 20여 년간 서울의 도시변화에 많은 영향을 준 시구개정사업을 시행하였으며 1934년에는 조선시가지계획령이 발표되었다. 이후 도시개발의 주축인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되어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영등포, 돈암, 대현지구 등 10개 지구의 서울 외곽지역이 개발되었다.
해방과 전쟁 : 격변기
해방 이후부터 제1공화국 시대인 1960년까지의 15년은 우리 역사상 격변의 시기였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경성부가 서울시로 개칭되고, 그 이듬해에는 경기도 관할로부터 분리되어 서울특별자유시가 되었다. 3년 뒤인 1949년에는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으며, 해외동포의 귀국, 월남한 난민과 이주민들의 서울 집중으로 인하여 도시행정구역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이후 한국전쟁은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도시파괴를 가져왔다. 부산임시수도시절 도시계획위원회에 의해 서울 전재 부흥 계획(1952.3.25 고시)이 수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크게 적용되지는 못했다.
고도성장의 중심도시 : 발전도약기
광복 이후 1960년까지가 혼란과 전란으로 인한 파괴에 시달린 시기였다면 1960년대부터는 그것을 딛고 일어서 서울이 현대도시로 부상해 나아가는 시기라 볼 수 있다. 현대적 도시건설의 초기라 할 수 있는 1960년대는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71)의 추진으로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게 된 때였다. 특히 서울로의 인구집중은 이 기간 동안 급속히 심화되어 1963년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서울의 도시계획구역이 동북부와 강남으로 확장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도시로의 과도한 집중이 점점 큰 문제로 대두되어 도시계획이 대도시권 성장억제 측면에서 접근되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지금까지의 서울위주의 도시건설로 인해 야기된 수도권 인구의 과밀화를 억제하고 전 국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구체적 계획들이 본격적으로 입안되었다.
한편 1970년대 이후는 서울이 명실상부한 현대도시로 탈바꿈하는 시기였다. 업무 및 상업의 중심지인 도심에 고층의 오피스 건물이 재개발사업을 통하여 들어서기 시작하였으며, 1960년대에 시작된 강남개발도 본격화되어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개발되었다. 청량리, 미아리, 영등포, 천호, 영동 등의 부도심이 형성되었고 부천, 의정부, 성남, 안양, 반월. 광명 등이 서울의 위성도시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도심의 현대화와 부도심의 형성, 그리고 외곽의 위성도시의 건설로 과거 서울의 시가지가 청계천과 종로를 경계로 북촌과 남촌이 구분되었던 것과는 달리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으로 구성되고 그 주위로 많은 위성도시들을 거느린 거대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대중교통도 버스에서 지하철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1974년 1호선 개통)
1980년대의 서울은 1981년 9월 올림픽 유치 결정과 11월의 아시안게임 유치 결정으로 도시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1980년대 서울의 도시개발은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정비와 건설의 시기였으며, 주택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대규모 택지개발도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서울의 광역화와 지속가능한 도시개발 : 번영기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 대회를 성공리에 치른 서울은 명실상부한 세계속의 국제도시로 부상하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울의 영향력은 시계를 넘어 광역화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단순한 행정체계상의 도시구분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다양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서울 대도시권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는 현재 서울 대도시권의 범위로 서울내의 반경 30~40km에 이르는 지역이며 향후 경기도 전역으로 확대되어갈 전망이다.
한편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의 개막과 함께 과거 성장 중심의 도시개발 정책에서 지속 가능한 도시 개발로 정책기조가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 7월, 전국 최초로 도시계획조례를 제정하였으며, 2002년 월드컵 대회 개최를 계기로 환경친화적 도시의 실현을 위한 정책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서 청계천 복원사업을 통해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환경친화적인 도시공간을 마련하였다.
세계 5대 대도시를 지향하며 : 도시경제문화의 주도기
창의시정을 이끌어가고 있는 서울은 ‘맑고 매력있는 세계도시’로서 성숙된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으며, 역사문화도시의 정체성 확보와 최첨단 국제도시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다양한 도시정책을 서울 공간상에 실현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정책사례로는 도심재창조 프로젝트와 한강 르네상스, 동북권 르네상스와 같은 권역별 계획과 용산국제업무지구, 마곡지구, 상암DMC 개발사업 등을 꼽을 수 있으며, 협상에 의한 개발방식인 新도시계획 체계의 운용은 도시계획행정의 투명성을 제고시킬 것이다. 또한 선진도시로의 품격과 격조 높은 도시미관을 연출하기 위한 도시디자인 부문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와 같은 미래지향적 도시계획을 기반으로 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서울은 세계 대도시 중 도시경쟁력 5위권인 창조도시로 재탄생할 것이다.